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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암 환자에게 필요한 건, 꽃 한송이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17)]

  • 관리자
  • 202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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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같이 울어주거나 꽃을 보내주세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암 환자에게 필요한 건, 꽃 한송이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암환자들에 건넨
“잘 먹어라” “운동하라” 충고의 말은
마음에 와닿기보다는 도리어 상처가 돼
이미 ‘전쟁 중인’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조용한 포옹·소박한 꽃 한송이일 수도

■대화

“몸 상태가 안 좋았는데 부모님 병간호를 하느라 병원 가기를 미루다 병을 키웠어요. 유방암 3기였어요. 림프에도 전이가 됐고요. 항암 치료를 16번 했어요. 3주의 주기로 했는데 항암만 1년이 넘게 걸렸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져 다행이지만 처음에는 정말 괴로웠죠. 그때 제 사진 보여줄 게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죠? 퉁퉁 붓고, 얼굴은 기미로 뒤덮이고, 몸에 있는 털은 모두 다 빠졌었죠. 발바닥 피부가 벗겨져 걷지도 못했고, 면역력이 떨어지니 이빨도 깨져 지금까지도 밴드로 묶어 놨어요.”

- 아, 얼마나 힘드셨어요. 선생님의 아픔은 정말 헤아리기조차 어렵네요.

“올케언니가 유방암이 걸렸었는데 잘 이겨냈거든요. 그래서인지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는 덤덤했어요. ‘뭐 나도 걸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항암 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고 많이 고통스러우니까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상담사였던 저도 제 마음이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 왜 안 그러셨겠어요. 당연히 우울하실 수밖에 없죠. 어떤 사람이 그 상황에서 괜찮을 수 있겠어요?

“암은 교통사고처럼 왔어요. 어느 날 제게 달려와서 갑자기 저를 덮치는 것처럼요. 교통사고가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기치 않게 일어나니 암 선고를 받고 나면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 맞아요. 저도 올 2월 ‘혹이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대학병원 세 군데를 찾아갔어요. 다행히 암이 아닌 선종으로 결과가 나왔지만 4개월 동안 마음이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때 저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암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많이 놀라셨겠어요. 암은 정말 트라우마예요. 꽤 많은 암 환자들이 암에 걸린 사실을 주변에 얘기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할까봐 힘들어하고, 동정할까봐 부담스러워 해요.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지만 부모님에게는 얘기하지 못했어요. 연로한 분들이라 충격 받으실까 봐 그랬어요.”

- 몸도 아픈데 마음도 힘들고, 인간관계도 어렵고, 정말 인고의 시간을 겪어내셨네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가장 힘든 시간은 지나갔어요. 그렇지만 암은 완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양병원에 있었을 때, 회복되고 10년도 넘었는데 폐로, 뇌로, 뼈로 전이돼서 오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암 환자들은 평생 관리를 해줘야 해요. 용기 있게 받아들이고 조심해서 살아야 해요. 사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울하고 불안하고 속상해서 살 수가 없죠.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힘을 내서 살아보니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감사하는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어쨌든 살았잖아요. 이제는 암 환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암 진단을 받으면 일단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어디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돌봐야 할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다 막막하고 혼란스러워요. 이럴 때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온 인생 선배들이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상담사로서 저도 그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 선생님의 고통 앞에서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도 좋은 상담사이셨지만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더욱 깊어지셨음을 알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저도 제가 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사명감을 느낍니다.”

모든 암이 그렇듯이 유방암은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정부을지대병원 송병주 교수가 유방암 의심 환자에게 유방 초음파 영상을 보여주며 외래 진료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모든 암이 그렇듯이 유방암은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정부을지대병원 송병주 교수가 유방암 의심 환자에게 유방 초음파 영상을 보여주며 외래 진료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언

국내의 암 경험자는 2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대수명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린 확률은 38%라고 하니, 세 사람 가운데 한 명 이상이다. 일본의 경우는 50%가 넘는데 우리나라 역시 머잖아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예정이기에 이 비율은 더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본인을 넘어 가족이 암에 걸릴 확률까지 생각한다면 암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암이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암은 이제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처럼 완치가 아닌 관리 차원의 병이 되어가고 있다. 현재 국내 암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70%를 넘어서고 있다.

상황이 이럼에도 암에 걸린 개인들은 여전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을 받는다. 말기 암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했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들의 심리를 다섯 단계로 정리한 바 있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단계가 그것이다.

이 변화는 반드시 순서대로 겪는 게 아니다. 2~3가지를 동시에 겪을 수도 있다. 처음 암 선고를 받으면 사람들은 여러 병원에 돌아다니며 다시 진단 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암이 확실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다음 단계인 분노가 나타난다. ‘왜 하필 나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된다. 이런 초기 단계가 심리적으로는 가장 힘들지만, 다음 단계인 우울, 타협, 수용 역시 많이 고통스럽다.

암 치료 과정에서는 수면 장애, 적응 장애, 불안 장애, 우울증 등의 심리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게 된다. 당연한 현상이다. 마음이 힘들어하는 암 환자에게는 가족과 전문가의 정서적 지지가 필수적이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치료에 대한 의지가 생기고 면역력도 유지돼 암과 싸워낼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마음 문제까지 스스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이미 전쟁 중이다.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언제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해주고,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겨주는 게 중요하다. 마음 관리가 된 암 환자들의 치료 예후가 좋고 부작용이 덜하고 생존율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미국 국립종합암센터네트워크(NCCN)는 미국 모든 암 병원에 종양학 소속 정신과 의사를 배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암 환자에게 정신건강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정신종양학’이란 암이 환자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암 환자의 심리적·사회적·행동적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국내에서도 대학병원급 암 병동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상주해 암 환자의 정신 재활을 돕고 있다.

지역병원에서도 이런 흐름은 관찰할 수 있다. 개원의사 1호로 정신종양학적 관점으로 암 환자들을 돕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이광민 원장은 필자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암은 ‘외상 후 장애’가 될 만한 고통스러운 병이지만 잘 극복한 후에는 ‘외상 후 성장’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잘 치료하고 관리하면 얼마든지 사회로의 복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암 환자의 스트레스에 큰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인 부담이다. 암 진단 후 5년 간 치료비는 국가에서 지원해주지만 신약의 대부분은 비급여 항목에 포함된다. 이런 약을 처방 받으려면 한 달에 수백만원이 드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억대가 넘는 경우도 있다. 약값을 대기 위해 살던 집을 파는 ‘메디컬 푸어’라는 말도 있다. 치료에 큰 효과가 있는 신약이 나왔는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가족들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고, 환자들의 마음은 더욱 복잡다단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다. 국가가 암 문제와 암 환자 지원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다.

동료 선생님이 덤덤하게 건넸던 말이 이 글을 정리하는 내 마음을 여전히 뒤흔들고 있다.
“암이 걸린 지인들이 있다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냥 같이 울어주세요. 여유가 된다면 맛있는 것 사주거나 꽃을 보내주세요. 맛있는 거 챙겨먹어라, 운동해라, 마음을 편히 가져라 하는 충고가 그 때는 정말 듣기 힘들어요. 암 환자가 되면 그런 좋은 충고들을 품을 마음의 여유가 없거든요. 저도 지인이 보내준 소박한 꽃으로부터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답니다.”

 

▶박상희 소장은



이화여대에서 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18년째 소장을 맡고 있다. 2014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다양한 연구에 참여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사진/기사 출처: 경향신문>

<기사원문>▶ https://www.khan.co.kr/life/health/article/202207151556015

[Youtube 박상희의 심리 스튜디오]